가상 세계 속 꽃은 정말 존재할까? — 디지털 객체의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새로운 시선

  

가상세계는 어쩌면 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요즘 메타버스(metaverse), 가상 현실(VR), 증강 현실(AR) 같은 단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게임 속 캐릭터, 가상 공간의 아이템, VR로 만든 전시회—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조작하며, 감정까지 느끼는’ 디지털 객체들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진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말한다. "가상 현실은 진짜 현실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VR 안의 물체들도 물리적 세계처럼 실재(real)로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주장에 대해 폴란드의 철학자 마리우슈 마주렉(Mariusz Mazurek)은 깊이 있는 분석과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제안을 더한다. 바로 칼 포퍼(Karl Popper)의 ‘제3세계(World III)’ 개념을 통해 가상 객체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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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것의 조건




차머스는 "가상 현실은 환상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상 객체들은 다음 다섯 가지 조건 중 일부, 혹은 전부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1. 존재함(existence) — 디지털 시스템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

2. 인과적 힘(causal power) —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며 현실에 영향을 준다.

3. 마음 독립성(mind-independence) — 사용자의 믿음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4. 비환상성(non-illusoriness) — 단순한 착시가 아니다.

5. 그 나름의 진정성(authenticity in kind) —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실질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VR 게임 안의 검은 그 세계 안에서는 실제로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싸움에서 승리도 이끌어낼 수 있는 "진짜 무기"다. 현실의 철로 된 검과는 다르지만, 가상 세계의 논리 안에서는 똑같이 기능하고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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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곧 실재?




차머스는 가상 객체들이 "디지털 원자(digital atoms)" 즉, 0과 1의 데이터로 이루어졌지만, 이 데이터 구조 자체가 존재의 기반이라고 본다. 이런 존재론은 기존의 "디지털=가짜"라는 인식을 깨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데이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데... 그걸 실재로 볼 수 있을까?



여기서 마주렉은 칼 포퍼의 ‘제3세계’를 불러온다. 포퍼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 제1세계: 물리적 사물 (예: 돌, 나무)

- 제2세계: 주관적 경험 (예: 감정, 생각)

- 제3세계: 지식, 이론, 문화적 산물 (예: 수학 개념, 법률, 소설 속 인물)



마주렉은 가상 객체들이 이 ‘제3세계’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고 조작할 수 있지만, 실체는 없는—즉 비물질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접근 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기존 추상 개념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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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화의 과정, 그리고 ‘문화적 실재’




가상 객체는 처음에는 개발자의 상상에서 태어난다. 이 단계에서는 매우 주관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것이 공개되고, 다수의 사용자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기능을 가지게 되면, 그 객체는 점차 객체화(objectification)된다. 즉, 하나의 문화적 실체로서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게임 속의 ‘마법의 꽃’이 많은 유저들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공통된 의미와 상징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단순한 픽셀 덩어리가 아니라 ‘공통 문화의 일부’가 된다. 마치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실재하지 않아도 문화적으로 실재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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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은 환상이 아니다




마주렉은 강조한다. 가상 세계는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비현실은 아니다. 그 존재 방식은 관계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이다. 가상 공간의 객체는 상호작용과 인식을 통해 실재성을 얻는다. 가상 도서관이 진짜 책을 담지 않아도, 정보의 흐름과 학습을 유도한다면, 그것은 "도서관으로 기능하는 실재"다.



이러한 사고는 물질 중심의 존재론에서 벗어나 다층적인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철학적 사유를 넘어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디지털 세계를 이해하고 다룰 것인지에 깊은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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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우리가 만든 세계가 다시 우리를 만든다




가상 객체의 존재론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실재’로 받아들이고, 어디까지를 ‘세계’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의 일부는, 분명히 "가상"이지만 동시에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상 세계의 꽃도 현실 세계의 꽃처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감정을 일으키며, 기억 속에 남는다면—그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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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Mazurek, M. The Ontology of Virtual Objects in David Chalmers’ Concept of Virtual Realism. Virtual Worlds, 2025, 4(11). https://doi.org/10.3390/virtualworlds401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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