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 로봇이 등장했다
AI 전정 로봇과 농부의 협업, 포도밭의 미래를 그리다 |
“어디를 자를지” 스스로 판단하는 전정 AI의 실현
전 세계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은 대부분 ‘전정(pruning)’이라는 고된 작업을 매년 반복한다. 전정이란 포도나무의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는 작업으로, 포도의 품질과 생산량을 좌우하는 핵심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매우 섬세하고 노동 집약적이라, 오랫동안 숙련된 농부의 경험과 눈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통 농업의 판도가 뒤바뀌고 있다.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대학의 연구팀은 “AI가 포도나무 가지를 보고, 어디를 자를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도전했고, 그 결과 실제 로봇 전정 시스템의 핵심 기술을 구현해냈다. 이름하여, “전정 포인트를 직접 찾아내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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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은 단순한 ‘절단’이 아니다
포도나무 전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냥 아무 가지나 자르면 안 된다.
너무 많이 자르면 이듬해 생산량이 줄고, 너무 적게 자르면 품질이 떨어진다. 특히 어디를 자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포도나무 가지에서 두 번째나 세 번째 싹(bud) 부근을 자르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 지점을 정확히 찾아야 포도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고, 열매도 풍성하게 맺는다.
그런데 이 중요한 작업이 아직도 전 세계 대부분의 포도밭에서 사람의 손에 의존하고 있다. 기계화된 전정 장비는 있지만, 대부분은 1차 가지 정리(pre-pruning) 수준에 머물며, 진짜 ‘정확한 잘라내기’는 숙련자의 눈에만 맡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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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가위를 맡길 수 있을까?
연구팀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딥러닝 기반 컴퓨터 비전 기술을 활용한 자동 전정 시스템을 설계했다. 핵심 목표는 명확하다:
"카메라로 포도나무를 촬영했을 때, AI가 '이 부분을 자르면 된다'고 실시간으로 판단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자."
이를 위해 연구팀은 대표적인 이미지 분할 알고리즘인 Mask R-CNN과 최신 객체 탐지 모델인 YOLOv8을 비교 분석했다. 이들이 실험한 핵심은 '가지 전체'가 아니라 '자르기 좋은 시작 부위'만 인식하는 기술이었다. 이는 단순히 객체 인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로얄식(Royat) 포도밭의 예비 전정 기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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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눈’과 ‘뇌’를 동시에 시험하다
실험에는 실제 포도밭에서 촬영된 536장의 이미지와 1만 2천여 개의 라벨 데이터셋이 사용됐다.
* 분류된 객체는 가지(shoot), 이미 잘린 가지(pruned shoot), 나무 몸통(trunk) 세 가지다.
* AI가 잘못 학습하는 걸 막기 위해 데이터 불균형 보정(augmentation)도 철저히 수행됐다.
이제 관건은 이 모델들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포도나무를 인식하느냐였다.
실험은 고성능 GPU 서버와, 실제 로봇에 탑재될 수 있는 Jetson AGX Orin 보드 위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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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도는? 속도는? “YOLOv8이 압승”
결과는 극명했다.
* Mask R-CNN: mAP50 기준 평균 정확도 0.521, 가지 인식 정확도(AP50) 0.359, 처리 속도 171ms
* YOLOv8-S: mAP50 0.883, 가지 인식 정확도 0.748, 처리 속도 55ms
무려 정확도는 2배 가까이 차이났고, 속도는 3배 이상 빠르다.
특히, 전정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자를 가지를 정확히 찾는 능력’이 YOLOv8에서 압도적으로 우수했다. 연구팀은 “정확도나 속도뿐 아니라, 실제 로봇 적용 가능성을 고려할 때도 YOLOv8-S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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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YOLOv8-S’인가? 단순함 속의 강력함
YOLOv8은 다섯 가지 크기(N~X)로 제공되는데, 그중 S(small) 버전이 가장 좋은 선택으로 평가됐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YOLOv8-M은 정확도가 약간 높지만, 속도는 느리고 연산량은 많음
* YOLOv8-S는 정확도가 거의 비슷하면서도 속도는 빠르고 모델은 가벼움
* 현장에선 30FPS까지 필요 없고, 15~20FPS면 충분하기 때문에 55ms의 속도는 실용적으로 매우 적합
결국, 작지만 똑똑한 모델이 실전에는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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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행동 유도’
이 연구의 진짜 강점은 단지 인식 기술이 아니라, "자르기 좋은 지점"을 직접 예측한다는 데 있다.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가지 전체나 싹만 찾았고, 자를 지점은 후처리(post-processing)로 따로 계산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처리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전정 로봇의 구조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복잡한 계산 없이, “여기 잘라!”라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은 상용화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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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계는? 진짜 로봇이 달린다!
이제 연구팀은 실험실을 벗어나 실제 포도밭에서 로봇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 RTK GPS 기반 위치 추적으로 로봇이 포도나무 앞을 정확히 이동하고,
* AI가 판단한 ‘절단 지점’을 바탕으로 로봇 팔이 직접 전정 가위를 작동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려 한다.
연구팀은 “AI가 내린 판단은 55ms면 충분하지만, 실제 로봇 팔이 움직이려면 몇 배 더 시간이 걸린다”며, “속도는 충분히 상용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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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AI는 이제 포도밭의 일꾼이다
지금까지 AI는 농업에서 ‘보조자’의 역할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이 연구는 “가지를 전체가 아닌 필요한 부분만 인식하는 방식”으로 전정 작업을 효율화했다는 점에서, AI 기술의 실질적 응용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정은 단지 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니다.
성장을 결정하고, 수확을 좌우하는 섬세한 판단의 예술이다.
그 예술을 이제 AI가 조금씩 이어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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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논문
Pacioni, E.; Abengózar, E.; Macías, M.M.; García-Orellana, C.J.; Gallardo, R.; González Velasco, H.M. *Towards Intelligent Pruning of Vineyards by Direct Detection of Cutting Areas*. Agriculture 2025, 15, 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