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세계에서 배우는 재난 대응: 수의대생들의 이색 훈련기
수의대 학생들이 위기에 처한 동물을 구하는 가상훈련을 하고 있다. |
– ‘Second Life®’에서 길 잃은 강아지를 찾는 이유 –
“지금, 당신 앞에 쓰러진 소는 진짜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치를 늦추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죠.”
이 문장은 게임 대사가 아니다.
텍사스 A&M 수의대 4학년 학생들이 겪는 가상 재난 시뮬레이션 속 한 장면이다.
허리케인이 마을을 휩쓸고 간 뒤, 남겨진 동물들.
긴급 구조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 수의대생들은 무너진 우리에서 탈출한 말,
코피를 흘리는 개, 혼란스러운 보호자, 그리고 감정 없는 경찰관까지 맞닥뜨린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가상현실 속 이야기다.
텍사스 A&M 수의대는 미국 최초로 가상 다중 사용자 환경(MUVE)을 활용해
재난 수의학 훈련을 실제처럼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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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의대에 재난 훈련이 필요할까?
미국에는 연평균 수십 건의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화재, 홍수, 허리케인, 토네이도... 피해는 사람만이 아니다.
수많은 반려동물과 가축들이 구조를 기다린다.
그런데 의외로 수의대 커리큘럼에 재난 훈련이 포함된 곳은 단 2곳뿐이다.
텍사스 A&M과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가 그 예외다.
논문은 이 중 텍사스 A&M의 2주간 실습형 재난 훈련 과정을 소개한다.
단순 강의가 아니다.
학생들은 지역 지자체, 동물 보호소, 동물원 등과 실제로 협력해 재난 계획을 수립하고,
‘Second Life®’ 가상현실 플랫폼을 통해 재난 상황에 직접 투입된 수의사 역할을 수행한다.
놀랍게도, 이 프로그램엔 이미 1,800명 이상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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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이렇게 진행된다
1주차: 재난 준비
지역사회 재난계획 수립
동물시설 점검
지역 공무원 및 응급대응자들과 협력
실제 카운티를 방문해 계획 제안
실견 구조견 훈련(Dog Training with Texas Task Force 1)
2주차: 재난 대응 실습
Second Life®에 아바타 생성
가상 시뮬레이션 환경 투입
응급 상황에서의 판단, 커뮤니케이션, 기록 작성 등 수행
가상 환자 치료, 약물 지급, 부상자 분류
훈련 후 임상 리뷰 및 피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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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Life® 안에서 수의대생이 하는 일
훈련 환경은 허리케인 아익(Hurricane Ike, 2008)과 모어 토네이도(Moore Tornado, 2013)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본부(Base of Operations)에서 아바타로 로그인한 뒤 가상 동물들과 상호작용하며 실제 같은 의료 판단을 해야 한다.
기술적으로도 매우 정교하다.
HUD(Heads-Up Display)를 통해 환자 정보 열람
의약품 캐시에서 약물 꺼내 사용
음성/채팅으로 보호자와 대화
전선에 닿으면 아바타 일시 정지 → 안전 수칙 학습
잘못된 치료를 하면 환자가 죽기도 함 → 피드백 즉시 반영
특히 기자, 경찰, 반려동물 보호자 등의 아바타를 연기하는 배우들도 등장해
학생들의 의사소통 능력, 윤리 의식, 위기 대응 역량을 종합적으로 시험한다.
그림 1. 야전 본부(BoO)의 모습으로, 왼쪽에 텐트 중 하나(환자 분류소)가 있고 오른쪽에 대형 지휘 차량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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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 훈련의 힘
논문은 이 훈련이 가지는 4가지 강점을 꼽는다:
1. 완전한 몰입형 학습: 오직 가상 세계에 집중
2. 리스크 제로: 환자나 사람 모두 실제로 다치지 않는다
3. 정량적 평가 가능: 모든 진료·대화가 기록되고 평가됨
4. 균등한 경험 제공: 누구나 같은 케이스, 같은 환경에서 훈련 가능
뿐만 아니라, 훈련 후에는 시뮬레이션을 되감기 하듯 복기(review)하면서
케이스 리뷰 및 임상 토론을 진행한다.
학생들은 실수와 배움을 나누며 의사로서의 비판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함께 키운다.
그림 3. 시뮬레이션 중 학생들이 사용하는 환자 파일(왼쪽)과 의료 장비(오른쪽)가 표시된 학생의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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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와 가능성
물론 한계도 있다:
* 환자의 생체 정보는 실시간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 촉각이나 후각 같은 감각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
* 참여자 간의 대화나 긴장도가 높아져 인지적 과부하가 발생할 수 있다
* 아바타 역할 배우 부족 → 일부 시나리오 제약 발생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안해도,
논문은 Second Life®가 의료 시뮬레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학생들 대부분은 처음엔 어색함을 느끼지만
점차 아바타 역할에 몰입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진짜 수의사처럼 행동한다고 느낀다.
그림 3. 시뮬레이션 중 학생들이 사용하는 환자 파일(왼쪽)과 의료 장비(오른쪽)가 표시된 학생의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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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계획: 더 현실적인 재난, 더 생생한 가상
논문은 미래에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1. 허리케인 전용 시나리오 추가
→ 침수 동물, 수분 손실 등 새로운 임상 문제 도입
2. 완전 몰입형 VR 도입 (예: Meta Quest)
→ 진짜처럼 보이고, 진짜처럼 느끼는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모델이 세계 어디서든 적용 가능하다는 점이다.
Second Life® 플랫폼만 있다면,
한국이든 아프리카든 누구든 가상공간에서 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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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위기 속에서 인간성과 전문성을 함께 기르다
수의사는 단순한 동물의사가 아니다.
특히 재난 상황에서는 공공 보건, 윤리, 커뮤니케이션, 정신력이 총동원되는 전문가다.
이번 연구는 보여준다.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기술을 통해 사람을 더 잘 준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한 마리 강아지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한 명의 수의사로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시대.
이제는 가상세계에서 그걸 먼저 연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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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논문
Johnson, K.; Espitia, N.; Zoran, D. Using a Multi-User Virtual Environment to Conduct Veterinary Disaster Preparedness Training. Virtual Worlds 2025,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