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기생충 알을 찾아낸다? 현미경 대신 컴퓨터가 나선 사연
기생충 감염은 이제 옛날 이야기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전 세계 6억 명 이상이 아직도 흙 속 기생충에 감염돼 있다. 대표적인 게 회충(아스카리스), 편충(편형선충), 구충(Hookworm)이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같은 저소득 지역의 아이들에게 흔하다. 영양실조, 성장 지연, 빈혈까지 이어져 평생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감염을 막으려면 약만 준다고 끝이 아니다. 누가 감염됐는지, 얼마나 심각한지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문제는 진단법이다. 50년 넘게 쓰여온 ‘카토-카츠(Kato-Katz)’ 기법은 똥 샘플을 유리판에 올려 현미경으로 직접 알을 세는 방법이다. 간단하긴 한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전문가가 꼭 있어야 한다. 감염 정도가 약하면 눈으로 보고도 놓치기 쉽다.
케냐 보건소에서 AI가 현미경 대신
스웨덴과 핀란드 연구진은 이 오래된 진단법을 완전히 새로 바꿔보기로 했다. 장소는 케냐의 한 초등학교와 시골 보건소. 연구진은 5세부터 16세까지 아이들 900여 명의 대변 샘플을 모았다. 샘플 수만 무려 965개. 모두 카토-카츠 방식으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기존 방식 그대로 현미경으로 먼저 검사했다.
그런데 이번엔 한 가지가 달랐다. 검사 후 슬라이드를 휴대용 전 슬라이드 스캐너로 싹 다 디지털 이미지로 바꿨다. 그리고 인공지능(AI)에 넣었다. AI가 슬라이드를 통째로 보고 기생충 알을 찾아내도록 학습시킨 것이다.
AI가 진짜로 사람보다 잘할까?
연구진은 총 3가지 방법을 비교했다.
- 전통적인 수동 현미경 검사
- 사람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자율 AI 검사
- AI가 찾아낸 결과를 전문가가 한 번 더 확인하는 전문가 검증 AI
정답은 어떻게 알았을까? 전문가들이 직접 현미경과 디지털 이미지 모두를 다시 살펴본 뒤, ‘복합 표준’을 만들어 진짜 양성을 정했다.
놓친 알도 찾아내는 AI의 성적표
결과는 놀라웠다.
- 수동 현미경은 회충을 겨우 50%만 찾아냈다. 편충은 31%, 구충은 77%가 고작이었다.
- 반면 AI는 회충은 50%로 같았지만, 편충은 84%를, 구충은 87%를 찾아냈다.
- 전문가가 한 번 더 확인한 AI는 회충을 100%, 편충을 93%, 구충을 92%까지 찾아냈다.
특히 중요한 건 대부분의 아이들이 경도 감염이었다는 점이다. 감염 강도가 낮으면 알이 적게 나오고, 작은 알이 현미경에서 쉽게 놓친다. 그런데 AI는 작은 알까지 거의 다 포착했다.
알이 하나라도 중요한 이유
많은 사람들이 “조금 감염된 게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흙 속 기생충은 알 하나로도 아이 몸 안에서 수백 마리로 불어난다. 감염이 반복되면 영양소를 빼앗기고, 성장판이 늦게 닫히며,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 학교에 나와도 배가 아파 집중을 못 한다. 그 피해는 평생 이어진다.
그래서 대규모 구충약 배포는 물론이고, 감염자를 조기 발견해 맞춤형으로 치료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가난한 지역엔 고급 검사 장비도, 전문가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AI가 사람을 대신한다면
연구진이 개발한 AI는 ‘자율 AI’와 ‘검증 AI’로 나뉜다. 자율 AI는 스스로 슬라이드를 분석하고 확률이 높은 알만 골라낸다. 하지만 알처럼 보이지만 아닌 것도 가끔 잡아낸다. 그래서 이번엔 의심되는 이미지를 전문가가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게, 웹 기반 AI 검증 도구까지 만들었다.
전문가는 AI가 제시한 이미지를 클릭만 하면 된다. 맞으면 ‘알’, 아니면 ‘아니다’를 선택하면 끝. 이 과정은 평균 1분이면 충분하다. 덕분에 빠르고 정확한 ‘사람+AI 협업 진단’이 가능해졌다.
놓친 알을 찾아낸 비밀, 두 번째 알고리즘
AI가 처음엔 못 잡아낸 것도 있다. 구충 알은 시간이 지나면 슬라이드에서 부분적으로 분해되는데, 기존 AI는 분해된 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연구에선 새 딥러닝 알고리즘을 하나 더 붙였다. 형태가 이상한 알도 잡아내는 특수 알고리즘 덕분에 구충 검출률이 무려 30% 가까이 뛰었다.
현장에서 실제로 쓸 수 있을까?
이 기술은 이미 케냐 보건소에서 시험됐다. 놀라운 건 속도였다.
- 샘플 하나를 스캔하는 데 5~10분
- AI 분석 5분
- 전문가 검증 1분
즉, 샘플 하나를 15분 안에 끝낼 수 있다. 현장에 전문가 한 명만 있으면 수십 개 샘플도 단시간에 분석 가능하다. 사람이 현미경으로 일일이 들여다볼 때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도는 더 높다.
앞으로 남은 숙제
연구팀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직 분자진단(PCR) 같은 첨단 방법과 직접 비교한 건 아니다. 또 AI를 보급하려면 휴대용 스캐너, 안정적인 인터넷, 전문가 훈련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WHO가 제시한 이상적 기준(민감도 77% 이상, 특이도 97% 이상)을 이미 만족했기에 기대가 크다.
다음 목표는 AI 현미경을 다른 열대질환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모바일 앱, 휴대용 스캐너만 있으면 누구나 원격에서 진단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
작은 알 하나가 바꾸는 큰 세상
흙 속 기생충 알 하나는 작다. 하지만 그 하나를 놓치지 않는 것이 수백만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이제 현미경 옆에는 AI가 함께 앉아 있다. 그리고 그 AI는 현미경이 놓친 작은 알 하나를 집어내어, 아이들에게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할지 모른다.
출처 논문
von Bahr, J., Suutala, A., Kucukel, H. et al.
AI-supported versus manual microscopy of Kato-Katz smears for diagnosis of soil-transmitted helminth infections in a primary healthcare setting.
Scientific Reports 2025, 15:20332.
https://doi.org/10.1038/s41598-025-073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