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우울증, 이제 AI가 실시간으로 알아챈다
산모와 아기의 따뜻한 실루엣, 그 곁에서 대화형 챗봇이 AI 회로망 속 감정 신호를 실시간 감지하다 |
아이를 낳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 기복. 하지만 그것이 심해지면 '산후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 PPD)'이라는 이름의 질환이 된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15%의 산모가 산후우울증을 경험하지만, 이 중 단 20%만이 제때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 질환은 단지 산모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와의 애착 형성, 전반적인 성장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조기 진단과 빠른 개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재 병원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진단법은 설문지 방식의 자가보고 형식. 예를 들어 '에딘버러 산후우울 척도(EPDS)'나 '우울증 건강 설문지(PHQ-2/9)'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자칫하면 산모가 자신의 상태를 축소하거나 숨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문화적 낙인이나 자각 부족이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기술로 극복하고자 한 연구가 나왔다. 스페인의 비고대학교(University of Vigo) 연구팀은 최신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산후우울증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그 결과를 직관적으로 설명해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핵심은 "대화 기반 진단"이다.
연구팀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대화를 인공지능이 분석해 우울증 위험 신호를 포착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대화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으로 이루어지며, 사용자는 챗봇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 인공지능은 이 대화를 기반으로 산모의 정서 상태를 판단하고, 그 결과를 의료진이나 사용자에게 설명해준다. 핵심 기술은 GPT-4와 같은 대형 언어 모델(LLM)과 머신러닝, 자연어 처리(NLP) 기술의 융합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 시스템이 "블랙박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내린 판단이 왜 그런지를 설명하지 못하면 실제 임상에서는 활용되기 어렵다. 연구팀은 의사결정 나무 기반의 알고리즘과 설명 가능한 AI(XAI) 기법을 활용해 어떤 발화 내용이 우울증 판단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연어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밤에 잠을 못 잔다"거나 "아기에게 짜증을 자주 낸다"고 말하면, 이 발화가 위험 신호로 판단되었음을 명확히 알려주는 식이다.
이 시스템은 8가지 주요 증상을 기준으로 사용자의 반응을 분류한다. '아기와의 유대감 저하', '집중력 문제', '슬픔과 눈물', '죄책감', '과민 반응', '식욕 변화', '자살 충동', '수면 장애' 등이 그것이다. 각 항목에 대해 인공지능은 '그렇다', '가끔 그렇다', '자주 그렇다', '아니다' 등으로 응답을 분류하고, 이를 기반으로 위험도를 평가한다.
실험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연구팀은 실제 산모들의 설문 데이터를 기반으로 모델을 학습시켰고, 그 정확도는 90%를 넘겼다. 기존의 오프라인 설문 기반 진단 모델이나 단순 문장 분석 기반 모델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보인 것이다. 특히 'ARFC(Adaptive Random Forest Classifier)' 알고리즘을 적용했을 때 가장 높은 정확도와 일관성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이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분석한다. 사용자의 말이 입력되면 곧바로 판단을 내리고, 결과를 설명하며, 필요한 경우 치료 방향까지 제안한다. 예컨대 '수면 장애', '자살 충동' 등의 징후가 함께 나타나면 즉시 전문가 상담을 권유하는 식이다.
개발된 시스템은 현재 안드로이드, iOS, 웹 기반 플랫폼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대화 내용은 최대 10개까지 저장되어 일관된 대화 흐름도 유지된다. 물론 사용자 개인정보 보호와 윤리 문제도 고려되었다. 모든 데이터는 비식별화되며, 사용자의 명시적 동의 없이는 수집되지 않는다.
이 연구의 의의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정교한 진단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특히 민감한 시기에 놓인 산모들의 정신건강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의 실제 적용이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이 "무엇을" 판단했는지를 넘어서,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술이 실제 임상현장에 도입된다면, 조기 개입을 통해 산후우울증의 악화를 막고, 더 나아가 산모와 아기의 삶의 질을 함께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헬스케어의 미래가,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출처 논문
García-Méndez, S.; de Arriba-Pérez, F. Detecting and Explaining Postpartum Depression in Real-Time with 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 *Applied Artificial Intelligence* 2025, 39, 2515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