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러닝으로 밝혀낸 고전 명화의 비밀

 

고전 회화 속 캔버스를 분석하는 인공지능: 딥러닝 회귀 모델이 X-ray 이미지에서 실 밀도를 추정해 작가 추정과 진위 감정에 활용된다.


 그림 속 천 조각, 알고 보니 화가의 지문이었다


수백 년 된 명화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천 조각이 화가의 정체를 알려준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림의 천을 분석해 진짜 작가를 찾는다’는 다소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더욱 정확하고 빠르게 만든 도구가 바로 인공지능이다.


최근 스페인의 세비야 대학과 프라도 미술관 연구팀은 오래된 유화의 캔버스 천을 분석하는 새로운 딥러닝 알고리즘을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논문 제목은 다소 딱딱한 <오래된 그림의 직물 계수를 위한 회귀 딥러닝 모델(Regression Deep Learning Models for Thread Counting in Old Paintings)>, 하지만 그 내용은 놀라움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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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감정의 판도를 바꾼 ‘실타래 수 세기’


유화 작품 대부분은 리넨 천 위에 그려지는데, 이 천은 ‘올(실)’이 가로세로로 얽힌 구조다. 이 올의 밀도, 즉 1cm당 실의 개수는 천의 제작 방식과 무명 롤에 따라 다르다.

바로 이 실 개수 패턴이 작품 간의 관계, 제작 시기, 심지어 작가의 손길까지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 고흐는 한 롤의 캔버스를 다 쓰고 나서야 새 천을 주문했다. 따라서 비슷한 올 패턴을 가진 작품은 같은 시기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푸생 등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천의 실 밀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이 손상되거나 덧칠되더라도 원래의 천 조직은 X-ray 이미지를 통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캔버스의 실밀도는 미술품 감정에서 과학적인 '지문'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올 세기’ 작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오래된 그림은 변색, 갈라짐, 오염 등으로 X-ray 이미지가 흐릿한 경우가 많고, 때로는 실이 너무 촘촘하거나 왜곡돼 있어 수작업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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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 방법의 한계: 너무 느리고, 너무 애매하다


기존에는 푸리에 변환(Fourier Transform)이라는 수학적 기법을 통해 실의 반복 패턴을 분석했다. 이 방식은 자동화할 수 있고, 노이즈에도 어느 정도 강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실 간 간격이 일정하지 않거나 캔버스가 비틀린 경우엔 정확도가 뚝 떨어진다.


또 다른 방식은 딥러닝 모델을 활용해 실이 교차하는 ‘십자점’을 하나하나 탐지한 다음, 그 위치 정보를 기반으로 실 밀도를 추정하는 접근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중간 단계가 너무 많다. 십자점을 찾고, 거리를 계산하고, 다시 실 개수로 환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류가 누적되기 쉽다. 무엇보다 학습 시 목표가 '실 개수'가 아니라 '위치 탐지'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정보가 희석되는 문제가 있었다.


요약하면, 지금까지의 방식은 정확하지도, 빠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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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연구의 전환점: 실 개수만 바로 본다!


이번에 발표된 연구는 관점을 완전히 바꿨다.

“실이 어디 있냐?”가 아니라

“실이 몇 개냐?”

이 단 하나의 질문에만 집중했다.


연구진은 U-Net과 VGG를 기반으로 한 딥러닝 회귀 모델을 만들어 이미지에서 직접 실 개수를 추정하게 했다. 즉, X-ray 이미지를 넣으면 '이 안에 실이 몇 개 있다'는 수치를 바로 출력하는 구조다. 중간 단계 없이 숫자를 바로 뽑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얻은 결과는 놀라웠다.


 * 기존 딥러닝 방식보다 오차율을 약 40% 줄임

 * 푸리에 기반 방식에 비해 정확도는 7배, 속도는 20% 향상

 * 추가적인 이미지 후처리나 수작업 없이 자동 처리 가능


특히 연구진은 적응형 전처리 기법을 도입해 그림의 상태에 따라 필터 사이즈를 조절하고, 히스토그램 균등화로 대비를 높이는 등 실질적인 개선책도 함께 제시했다. 또한 데이터가 부족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준지도 학습(semi-supervised learning)을 적용, 기존 AI 모델이 잘 예측한 결과만 선별해 학습 데이터로 재활용하는 전략을 썼다.


직조 방식 및 X선 촬영본에서의 직물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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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적용 사례: 명화의 정체를 밝히다


이 기술이 단순한 실험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프라도 미술관의 두 작품,

벨라스케스의 안토니아와 아들과 디에고 델 코랄이다.


두 그림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캔버스라고 여겨졌지만, 새로운 딥러닝 기법을 통해 완벽히 일치하는 실 밀도 지도를 발견했다. 결국 두 작품은 같은 천 롤에서 잘라 사용한 것으로 판명됐다. 남편과 아내를 그린 초상화라는 사실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또한 리지와 에레라 엘 모소로 추정됐던 두 작품의 캔버스를 비교한 결과, 이 역시 같은 천에서 제작된 것으로 나타나 작가 추정에도 큰 도움이 됐다. 실제로 이 분석 결과는 프라도 미술관이 공식 작가 정보를 수정하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됐다.


국립미술관 소장 푸생의 작품 두 점을 비교 분석한 결과도 인상 깊다. 이 경우는 딥러닝이 아니라 기존의 머신러닝 기반 방법과도 비교했는데, 회귀 딥러닝 모델이 노이즈와 실수 없이 매끄럽게 일치하는 실 밀도 패턴을 잡아낸 반면, 기존 방법은 고밀도 구간에서 불안정한 결과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실 개수의 정확도 향상에 그치지 않는다. 진위 여부, 복원 이력, 작품의 절단 여부까지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FT를 이용한 수직 실 밀도 맵 계산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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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기술이 아닌, 예술을 되살리는 도구


이번 연구의 진정한 가치는 예술사와 보존과학의 경계를 허문 데 있다.

딥러닝은 이제 단순히 “무엇을 그렸나”를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

“무엇에 그렸나”를 이해하는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천 조각 하나에서 시작된 분석이 작가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림의 시대를 되짚으며, 나아가 문화유산을 더욱 정확히 보존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과연 다음에는 어떤 명화가, 어떤 실타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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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논문

Delgado, A.; Murillo-Fuentes, J.J.; Alba-Carcelén, L. Thread Counting in Plain Weave for Old Paintings Using Regression Deep Learning Models. International Journal of Computer Vision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