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자바 전통 음악, 가멜란 랜드 이야기
VR 헤드셋을 쓴 사용자가 가상 가멜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메타버스 속에서 전통 자바 음악이 되살아난다. |
가상에서 울려 퍼지는 전통의 소리
2024년,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의 한 연구팀이 흥미로운 실험을 감행했다. 이름하여 ‘가멜란 랜드(Gamelan Land)’. 전통 자바 음악인 가멜란을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메타버스 공간에서 연주할 수 있게 만든 가상현실 게임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청동과 나무로 만든 악기들이 헤드셋 안에서 되살아나고, 세계 각국의 연주자들이 하나의 스튜디오에 모여 합주를 할 수 있다니.
전통을 디지털로 옮긴다는 시도는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 중심에 ‘사회적 존재감(Social Presence)’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어, 실제 커뮤니티처럼 느껴지도록 설계한 게임은 매우 드물다. 자바 전통을 살아 있는 문화로 지켜가기 위한 이들의 노력, 지금부터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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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의 혼, 가멜란… 그 울림을 메타버스로 옮기다
가멜란(Gamelan)은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의 전통 타악기 앙상블이다. 청동이나 놋쇠로 만든 종, 북, 현악기, 피리 등이 어우러져 장중하면서도 몽환적인 음향을 만든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도 그 예술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 전통음악의 생명은 공동체에 있다. 연습과 공연, 교육과 토론까지 함께 이루어지는 커뮤니티가 바로 가멜란의 중심이다. 문제는, 이런 공동체가 점점 흩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해외에 퍼져 있는 200개 이상의 미국 내 가멜란 그룹, 160개에 달하는 영국의 가멜란 커뮤니티들은 물리적 거리가 협업에 큰 장벽이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가멜란 랜드(GL)’. 이 게임은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전 세계 가멜란 애호가들을 하나의 ‘가상 스튜디오’로 연결하려는 시도다. 단순히 연주만 하는 게 아니다. 가상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멤버를 모집하고, 관객을 유치하며, ‘Kreweng’이라는 게임 화폐로 보상을 받는 등 실제 가멜란 공동체의 구조와 삶을 충실히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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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만들었을까? 현실을 닮은 가상의 스튜디오
연구팀은 먼저 실제 가멜란 스튜디오를 조사했다. 악기 실측, 사진 촬영, 음계별 녹음 등 현실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3D 모델을 만들었다. 시각적으로도 전통 자바 건축 양식을 충실히 반영했다. 게임 내에서는 플레이어가 연주자, 강사, 관객, 가수 등의 역할을 맡고, 각자의 활동에 따라 포인트를 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포인트가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Kreweng’이라는 가상의 통화라는 것. 오래 머물고, 활발히 참여하고, 다른 유저에게 인정받을수록 더 많은 Kreweng을 얻는다. 이 포인트는 급여처럼 분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강사는 자신의 Kreweng에 일정 비율을 더해서 급여를 받는다. 현실처럼 실력이 좋아야 소득도 늘어나는 구조다.
플랫폼은 Oculus Quest 2와 Unity3D를 기반으로 개발되었고, 실제 온라인으로 14명의 참가자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접속해 연주를 진행했다. 여기서도 물리적인 ‘연결’의 장벽을 가상현실이 뛰어넘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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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어땠을까? 가능성과 한계, 그 사이에서
10일간의 실험 기간 동안, 참가자들은 GL 게임을 통해 연습하고, 서로 교류하며, 포인트를 모았다. 이들의 평균 플레이 시간은 약 950초. 가장 오래 머문 사용자는 총 3만 초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다.
다만 완벽하진 않았다. 손의 움직임과 가상 악기의 반응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 등 ‘동기화 문제’는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연주 초반에는 동기화가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연습을 반복하면서 점차 개선되는 경향도 확인되었다. 즉, ‘연습이 해답’인 셈이다.
또한 배경 디자인에 따라 멀미(사이버 멀미) 반응이 달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닫힌 공간(실내 스튜디오)보다 열린 공간(야외 스튜디오)에서 멀미 증상이 적었다는 결과는 향후 배경 설계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점은 참가자 대부분이 이 게임이 현실의 가멜란 활동을 충실히 반영했고, 실제 커뮤니티에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느꼈다고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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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가멜란 경제’까지 구상 중
GL 게임은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다. 향후 계획은 더 야심차다. 지금은 단순한 포인트에 불과한 Kreweng을,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으로 전환해 진짜 가상 경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 유저들은 토큰을 사고팔며 악기를 구입하거나 공연을 기획할 수 있고, 심지어 서로 거래까지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즉, ‘가상 커뮤니티’ 수준을 넘어, 진짜 하나의 사회, 경제, 문화가 돌아가는 디지털 마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멜란 랜드는 단지 전통음악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 숨 쉬게 만들려는 실험이다.
가상현실은 이제 단지 엔터테인먼트의 수단이 아니다. 전통을 이어가는 통로이자, 흩어진 공동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실험은 그 가능성을 우리 눈앞에 선명하게 보여줬다.
출처 논문
Syukur, A., Andona, P.N., Syarif, A.M. (2024). *Gamelan Land: A Multiplayer Virtual Reality Game based on a Social Presence Approach*. Journal of Metaverse, 4(1),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