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로 본 자전거 내리막길 주행, 몸과 마음은 진짜처럼 반응했다

VR 고글을 착용한 사이클리스트가 가상의 내리막길을 질주한다. 실제로는 정지된 자전거 위에 앉아있지만,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몸은 진짜처럼 긴장된 상태다. 몰입감 높은 가상현실이 얼마나 강한 심리·생리적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속도가 붙는다. 핸들 너머로 굽이치는 도로가 빠르게 다가온다. 그런데 몸은 꼼짝 않고 있다. 왜냐고? 여긴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VR) 세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구팀은 이처럼 몰입감 넘치는 VR 환경이 실제 상황처럼 사람의 몸과 감정을 어떻게 반응하게 만드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고글을 쓰고 가상 내리막길을 체험한 사람들은 실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심박수가 오르고, 손바닥에 땀이 차고, 어깨와 팔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등 다양한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다. 마치 "가짜가 진짜를 이긴" 순간이었다.


이 실험은 특히 스포츠 훈련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고위험 훈련이 현실에서 어렵거나 위험한 경우, VR이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속 내리막길을 훈련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사고 위험이 너무 큰 사이클 선수들에게, 이 연구는 VR이라는 안전한 대안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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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보다 더 무섭다"…VR이 만든 가짜 내리막길


연구는 18명의 젊은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모두 건강했지만 자전거 경험은 각기 달랐다. 일부는 거의 초보 수준이었고, 일부는 수천 시간의 훈련을 쌓은 아마추어 고수였다. 참가자들은 모두 6가지 조건에서 내리막길 영상을 체험했다:


1. 의자에 앉아 휴식만 취함 (SIT-REST)

2. 의자에 앉아 2D 화면 시청 (SIT-S)

3. 의자에 앉아 VR 고글 착용 (SIT-VR)

4. 사이클 에르고미터에 앉아 휴식 (ERG-REST)

5. 에르고미터 + 2D 화면 (ERG-S)

6. 에르고미터 + VR 고글 (ERG-VR)


특히 마지막 조건인 ERG-VR은 실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느낌을 가장 잘 재현한 환경이었다. 자전거는 15도 기울여졌고, 참가자는 페달을 밟진 않았지만 실제 경사와 자세가 그대로 구현되었다. 영상은 프랑스의 프로 사이클 선수가 직접 내리막길을 달리며 360도로 촬영한 실사였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ERG-VR 조건에서 심박수는 평균 9% 증가, 피부 전도도는 약 99% 상승, 어깨와 팔 근육에도 큰 긴장이 나타났다. 실험 참가자들은 "속도감이 무섭다", "떨어질까 두렵다"는 감정을 느꼈고, VR 환경이 실제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심지어 일부는 멀미와 메스꺼움을 호소했다. 바로 '사이버 멀미(cybersickness)'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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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타본 사람일수록 덜 무섭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자전거 경험이 많은 참가자일수록 이런 반응이 적었다는 것이다. 가령, 고수 참가자들은 심박수나 피부 반응에서 더 적은 변화를 보였고, 어깨 근육도 덜 긴장했다. 마치 "이건 가짜야"라고 자기 뇌와 몸을 설득하는 듯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은 "더 긴장됐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몸은 덜 반응했지만 마음은 더 민감했다는 뜻이다. 이는 훈련된 선수들이 상황의 위험성을 더 잘 인식하고,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더 예민하게 파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훈련은 스트레스를 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를 더 민감하게 자각하게 만든다.


이와 달리 자전거 경험이 적은 참가자들은 가상 상황 속에서 훨씬 더 크게 반응했다. 몸은 긴장했고, 멀미도 더 자주 호소했다. 이는 곧 VR 훈련이 초보자에게는 공포 극복 훈련으로, 숙련자에게는 위기 인지 및 자제력 훈련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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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이 어렵거나 위험할 때, VR이 답이 될 수 있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가상현실이 "몰입감 있다"는 수준을 넘어,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와 근육 반응, 감정까지 자극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스포츠 훈련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가령 내리막길 공포를 가진 선수들이 VR을 통해 미리 위험 상황에 익숙해지면, 실제 경기에서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 또 사고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선수들에게도, VR은 현실보다 더 안전하면서도 실전같은 회복 훈련을 제공할 수 있다. 더욱이 감각 자극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 노출(graded exposure) 방식으로 심리적 회복을 유도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물론 단점도 있다. 일부 참가자들은 사이버 멀미를 호소했고, 짧은 시간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 페달을 밟는 등의 능동적인 상호작용이 없는 '수동 체험'이었던 점도 한계다. 그러나 이 연구는 분명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앞으로 VR과 실제 자전거 동작을 결합한 능동 훈련 시스템이 개발된다면, 그 효과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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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VR, 훈련의 새로운 차원을 열다


이번 연구는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VR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적절히 설계된 가상현실은 우리 몸의 본능을 자극하고, 실제처럼 반응하게 만들 수 있다. 이는 곧 스포츠 훈련, 정신력 강화, 심리 회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VR이 실질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이클 훈련처럼 위험 요소가 많은 종목에서는 VR이 훈련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다만 개개인의 반응 차이, 멀미 등은 여전히 고려해야 할 요소이며, 앞으로는 더 다양한 집단과 조건에서의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가짜 내리막길 하나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 감정, 몸이 얼마나 쉽게 "믿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고, 동시에 훈련의 미래를 여는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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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논문

Behava, M., Charlot, J., Boisson, N., Groslambert, A., Grappe, F., & Grosprêtre, S. (2025). Neurophysiological and subjective responses to a virtual downhill cycling exercise. *Virtual Reality, 2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