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번역, 학생 번역보다 낫다고?
“기계 번역은 아직 멀었다.” “구글 번역기 믿으면 큰일 난다.”
이런 말,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우디아라비아 킹파이살대학교의 아나스 알코피 연구팀은 이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대학생 번역과 구글 번역(Google Translate)의 실력을 직접 비교해본 것이다.
연구진은 영어를 전공한 사우디 대학생 20명을 대상으로 영어 문장을 아랍어로 번역하게 했다. 같은 문장을 이번엔 구글 번역으로도 돌렸다. 과연 누구의 번역이 더 나았을까? 결과는 놀라웠다. 교수진 22명이 평가한 점수는 학생 번역보다 AI 번역이 더 높았다!
번역 교육 현장, AI는 불청객일까?
교육 현장에서는 아직도 “번역 공부할 땐 번역기를 쓰지 마라”는 지도가 흔하다. 기계 번역에 너무 의존하면 문법이나 어휘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구글 번역 사용을 금지하거나 최소화하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학생들은 이미 몰래 번역기를 쓴다. 모르는 단어는 물론이고 문장 구조까지 AI의 도움을 받는다. 알코피 연구팀은 그렇다면 차라리 이걸 금지할 게 아니라, 잘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실험은 22명의 언어학 교수들이 학생 번역과 구글 번역을 구분하지 못한 채 평가하도록 설계됐다. 번역이 좋으면 점수를 높게 주고, 나쁘면 낮게 주도록 했다. 재미있는 점은 교수들이 좋은 번역을 학생 작품이라고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나쁜 번역은 ‘기계가 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학생이 한 것이었다.
왜 구글 번역이 더 잘했을까?
번역 기술은 2016년쯤부터 큰 전환점을 맞았다. 기존의 ‘통계 기반 번역’에서 ‘신경망 번역(NMT)’으로 바뀌면서 품질이 급상승했다. 구글 번역도 그 덕을 봤다. 특히 영어 같은 데이터가 풍부한 언어는 기계 번역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문장을 뽑아낸다.
이번 연구에서도 번역 방향이 영어에서 아랍어로 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어는 AI가 학습한 데이터가 방대하다. 반면 아랍어는 문법이 복잡하고 어휘 변화가 다양해 AI에게 더 어렵다. 하지만 영어를 원문으로 두면 AI가 훨씬 안정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AI 번역 만능론’을 펼칠 수는 없다. 긴 글, 문맥 흐름, 문화적 뉘앙스까지 고려해야 하는 수준에서는 여전히 인간 번역가가 우위에 있다. 하지만 짧은 문장, 직역이 많은 정보성 텍스트는 AI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걸 이번 연구가 입증한 셈이다.
AI는 학생의 경쟁자인가, 조력자인가
AI 번역이 학생보다 낫다는 결과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무턱대고 AI에 맡겨두면 학생들은 번역 실력을 쌓지 못한다. 하지만 금지한다고 해서 쓰지 않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AI 번역을 ‘활용하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 ‘포스트 에디팅(Post-Editing)’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I 번역이 뽑아낸 초안을 사람이 교정하면서 품질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어휘력, 문법, 맥락 판단 능력을 함께 키울 수 있다.
이번 연구에서도 교수들은 번역의 ‘출처’를 맞히는 데는 약했다. AI가 낸 문장을 사람 작품이라 믿고, 학생 작품을 AI가 한 것으로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AI에 대한 인식이 아직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실에서 번역기를 금지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점은 학생들 스스로도 AI 번역의 한계를 잘 안다는 점이다. 기계 번역은 문법이나 문장 구조는 그럴싸하지만, 특정 맥락이나 문화적 표현은 종종 엉뚱하다. 그래서 번역을 맡겨놓기보다는, 좋은 ‘뼈대’를 가져오고 스스로 다듬는 방식으로 활용한다.
알코피 연구팀은 번역 수업에서 ‘번역기 금지’ 대신 ‘번역기 잘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미 업계에서는 번역가들이 AI 번역을 활용해 초안을 뽑고, 여기에 사람의 손길을 더해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교육 현장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기를 몰래 쓰는 학생을 단속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포스트 에디팅 과제를 내고 평가하면 더 현실적이다. 실제로 포스트 에디팅은 번역가 지망생의 부담을 줄이고,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실무 기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번역가의 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AI 번역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하지만 번역가라는 직업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AI 덕분에 번역가는 더 고차원적인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예술적 표현, 문학적 번역, 문화 간 조율 등은 여전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결국 번역가는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도구로 삼아야 한다. 이번 연구는 그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셈이다. 학생 번역이 AI보다 부족했다는 사실은 충격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사람의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출처 논문
Alkhofi, A. Man vs. machine: can AI outperform ESL student translations? Frontiers in Artificial Intelligence 2025, 8:1624754.
https://doi.org/10.3389/frai.2025.1624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