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블록, 물리학처럼 예측하다
블록체인의 세계는 혼돈 속 질서를 추구하는 게임이다.
블록체인의 세계는 혼돈 속 질서를 추구하는 게임이다. 전 세계 수많은 컴퓨터들이 같은 퍼즐을 푸는 이 시스템에서, 누가 언제 정답을 맞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최근 한 연구팀이 이 무작위성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블록 발행 시간"을 사전에 예측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수학의 힘을 빌려.
블록체인 시뮬레이션의 핵심은 '블록이 언제 만들어지는가'다. 특히 비트코인처럼 작업증명(Proof of Work, PoW)을 사용하는 시스템에서는, 채굴자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블록을 만들며, 그 시점은 무작위처럼 보인다. 이 '무작위성'은 보통 포아송 분포(Poisson distribution)로 모델링된다. 하지만 이 연구는 다른 길을 택했다. 각 채굴자 입장에서, 해시 연산을 반복하다가 일정 확률로 성공하는 구조에 주목한 것이다. 이 과정은 수학적으로는 '기하분포(geometric distribution)'로 표현된다.
난이도 조정: 예측의 변수
기하분포는 간단하다. 어떤 일이 성공할 확률이 p일 때, k번째 시도에 처음 성공할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다. 블록체인에서는 '해시값이 목표값보다 작을 확률'이 p가 되고, 채굴자는 이 확률에 따라 수많은 실패 끝에 드디어 한 번 성공한다. 이론상으론 깔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로 '난이도 조정' 때문이다. 비트코인에서는 약 10분마다 하나의 블록이 만들어지도록 전체 네트워크의 해시파워를 감안해 '난이도'를 조정한다. 전체 해시파워가 세 배로 늘면, 난이도도 세 배 올라간다. 문제는 이로 인해 p 값이 시간에 따라 바뀐다는 점이다. 기존의 기하분포는 확률이 일정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현실의 블록 발행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
새로운 모델의 등장: GD-VP
그래서 연구팀은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변수 확률 기하분포(Geometric Distribution with Variable Probability)', 줄여서 GD-VP. 이름만 들어도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확률이 바뀌는 시점을 기준으로 구간을 나누고, 각 구간마다 고정된 확률로 기하분포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여러 구간의 결과를 이어붙이면 전체 확률 모델이 완성된다.
이 방식이 왜 유용할까? 블록체인 시뮬레이터는 실제로 해시 연산을 실행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대신, 각 채굴자가 다음 블록을 언제쯤 만들지를 미리 계산해두고, 그 시간에 이벤트를 발생시킨다. 이걸 '이산 이벤트 시뮬레이션(Discrete Event Simulation)'이라 부른다. GD-VP는 바로 이 시뮬레이션에서 현실적인 '블록 발행 예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현실을 재현하는 BEE 시뮬레이터
연구팀은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블록체인 실행 환경(Blockchain Execution Environment, BEE)'이라는 시뮬레이션 도구도 만들었다. 이 시뮬레이터는 각 채굴자의 해시파워, 블록 전파 지연 시간 등을 반영해 정밀한 네트워크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GD-VP 덕분에, 난이도가 바뀔 때마다 각 채굴자의 블록 발행 시점을 빠르게 재조정할 수 있다. 이 재계산도 단순히 전체 과정을 다시 하는 게 아니라, 누적값을 저장해두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업데이트하는 '재귀적 방식'으로 처리된다.
시뮬레이션 결과도 흥미롭다. GD-VP를 적용하면, 채굴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블록 생성 간격이 빠르게 원래의 평균값(예: 600초)으로 복원된다. 실제 블록체인의 난이도 조정 메커니즘과 유사한 반응을 잘 재현해낸 것이다.
더 넓은 응용 가능성
또한 연구팀은 이 도구가 단지 비트코인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블록체인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블록체인의 합의 메커니즘이 다양한 조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실험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연구자나 학생들에게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논문은 단지 블록체인 분야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GD-VP라는 확률 모델 자체가, 확률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시스템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통계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예컨대, 마케팅 캠페인에서 소비자의 반응 확률이 시점마다 바뀌는 경우나, 네트워크 혼잡에 따라 데이터 패킷 전송 성공률이 달라지는 경우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결론: 기술의 진화, 과학의 언어로
결국 이 연구는,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수학적 본능의 또 다른 사례다. 전 세계 수많은 컴퓨터들이 경쟁적으로 블록을 만들며 진화를 거듭하는 블록체인의 세계.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정밀하게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는, 기술이 과학으로 향하는 진화의 또 하나의 단면일 것이다.
출처
Maresca, M., Andreoli, L., & Baglietto, P. (2025). Leveraging Geometric Distribution with Variable Probability to Pre-Calculate Block Publication Deadlines in a Blockchain Simulation. Blockchains, 3(2), 9. https://doi.org/10.3390/blockchains302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