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역량, 오픈소스가 채워줄 수 있을까—프랑스 SILL에서 찾아본 ‘디지콤프’ 빈칸 지도
툴은 넘치지만, 역량은 고르게 자라지 않는다
유럽연합의 시민 디지털 역량 표준 ‘디지콤프(DigComp)’는 정보를 찾고(문해력), 함께 소통하고(협업), 콘텐츠를 만들고(창작), 안전을 지키고(보안), 문제를 푸는 능력(문제해결)까지 다섯 영역으로 디지털 삶의 기본기를 정의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주변의 오픈소스 도구들은 이 다섯 영역을 얼마나 고르게 받쳐줄까? 프랑스 정부의 오픈소스 추천 목록(SILL)에 올라 있는 도구들을 디지콤프에 하나하나 대응시켜 본 연구가 나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콘텐츠 제작과 협업은 풍성했지만, 안전과 문제해결은 빈약했다.”
연구진은 일반 시민의 디지털 기술 격차를 줄이려면, ‘어떤 역량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를 사용자 관점에서 보여주는 지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지콤프는 바로 그 지도의 좌표계다. 다섯 영역(문해력·협업·창작·안전·문제해결)과 21개 세부 역량으로 구성된 이 프레임은 유럽 전역에서 사실상의 표준으로 쓰인다.
어떻게 분류했고, 무엇이 드러났나
데이터는 어디서 왔나
연구진은 프랑스 공공부문이 실제로 쓰길 권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카탈로그 SILL을 전수 조사했다. 각 도구의 용도·라이선스·발표/최종 업데이트 연도 등을 추출해, 디지콤프 21개 세부 역량 가운데 “가장 주된 용도”에 1:1로 매핑했다. 중복 기능이 있더라도 대표 용도를 기준으로 한 칼 분류다. 이후 거미줄(spider) 다이어그램으로 영역별 분포를 시각화해, 도구가 많은 곳과 적은 곳—그리고 아예 없는 곳을 표시했다. 교육 현장에서도 이 지도가 교사 역량(DigCompEdu)과 학습자 역량(DigComp)이 만나는 지점을 밝혀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배치했나
디지콤프 21개 역량은 예컨대 ‘1.1 탐색·검색·필터링’, ‘2.4 협업’, ‘3.4 프로그래밍’, ‘4.2 개인정보 보호’, ‘5.1 기술 문제 해결’처럼 세부적으로 나뉜다. 연구는 각 역량별로 해당될 법한 도구의 범주(예: 브라우저·검색엔진·버전관리·암호관리·IDE·CI/CD 등)를 먼저 정의하고, 그 안에 실제 SILL 도구를 채워 넣었다.
결과 1: ‘창작’과 ‘협업’은 풍년
콘텐츠 제작과 통합(3.1·3.2), 프로그래밍(3.4)에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오픈소스들이 다수 포진했다. 워드프레스·드루팔·미디어위키 같은 CMS/위키, 지믎·잉크스케이프 같은 그래픽 도구, 리브레오피스·PDF 관리자·텍스트 에디터, 그리고 파이썬·R·주피터·이클립스·아두이노 IDE·젠킨스·셀레니움 같은 프로그래밍/자동화·테스트 도구까지 줄줄이다. 협업 영역에서도 깃·깃랩·지테아 같은 버전관리·협업 개발 생태계가 단단히 받쳐줬다.
정보 공유(2.2) 역시 웹서버(아파치·Nginx), 파일공유(넥스트클라우드·WinSCP·FileZilla), 전자학습(무들·Chamilo), 화상회의(BigBlueButton), 메일서버(Postfix) 등 기반 인프라가 고르게 확인됐다.
결과 2: ‘안전’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보안(4.1·4.2) 쪽에서는 클램AV(안티바이러스), uBlock Origin(추적 차단), 베라크립트(디스크 암호화), 트리비(컨테이너 이미지 스캐너), 패스워드 관리자(비트워든·키패스) 등이 자리했지만, “디지털 건강·웰빙(4.3)”과 “환경(4.4)”은 아예 빈칸으로 남았다. 온라인에서의 피로·과다노출을 관리하거나, 디지털 기기의 환경 발자국을 체계적으로 줄이는 오픈소스 도구가 SILL 기준으로는 없다는 뜻이다.
결과 3: ‘문제해결’은 통째로 공백
가장 뼈아픈 대목은 문제해결(영역 5)이다. ‘기술 문제 해결(5.1)’, ‘요구 파악과 기술적 대응(5.2)’, ‘창의적 활용(5.3)’, ‘역량 격차 진단(5.4)’ 전부에 “특화 도구”가 잡히지 않았다. 연구진은 외부의 온라인 강좌나 커뮤니티, 유로파스(Europass)의 디지털 스킬 자가진단 같은 대안을 소개하지만, 공공이 권장하는 오픈소스 툴의 빈자리는 명확했다.
작은 불균형들: ‘네티켓’과 ‘저작권’
소통·협업 영역에서 ‘네티켓(2.5)’은 마찬가지로 표본이 없었다. 반면 디지털 신원 관리(2.6)에는 Keycloak·CAS·OpenLDAP 등 굵직한 솔루션이 올라왔다. 저작권/라이선스(3.3)는 주로 인용·서지 관리(Zotero·JabRef)에 치우쳐, 실사용자가 체감할 수 있는 창작물 라이선스 안내·검증 도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배경: 왜 ‘디지콤프’인가
디지콤프는 2010년 시작돼 현재 2.2 버전으로, “학습·일·사회 참여를 위한 디지털 기술의 자신감 있고 비판적이며 책임 있는 활용”을 핵심 정의로 삼는다. 다섯 영역—문해력·협업·창작·안전·문제해결—과 21개 역량으로 구성돼 정책·교육 현장의 공통 언어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2025년부터는 차기 버전(3.0)을 논의하며 생성형 AI를 “모든 역량에 얽힌 가로축”으로 다루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다만 이 연구는 관찰 시점을 2023년으로 제한해 AI 도구는 별도 부록으로만 다뤘다.
결론: 개발자는 빈칸을, 정책은 다리 놓기를
연구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시민의 디지털 역량을 넓히려면 공공이 신뢰하는 오픈소스 도구 지형이 다섯 영역을 고르게 덮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창작·협업’ 중심의 풍년과 ‘안전·문제해결’의 흉년이 공존한다. 교육자는 수업 설계에 애를 먹고, 학습자는 실습 기회가 부족해 역량이 자라지 못한다. 정책은 이 빈칸을 외면하거나 축소하기보다, 개발 커뮤니티와 호응해 빈 영역을 겨냥한 신규 오픈소스 도구 개발을 촉진해야 한다. 연구진은 특히 안전과 문제해결 영역의 도구 개발을 강력히 권고했다.
현장의 다음 스텝도 선명하다.
- 개발자: 네티켓, 건강·웰빙, 환경, 문제해결 전 영역(5.x) 등 공백을 채우는 경량·현장형 도구를 만들자.
- 교육자: 이미 존재하는 오픈소스(협업·창작)를 적극 채택하고, 부족한 역량은 커뮤니티·오픈 코스와 연계해 보완하자.
- 정책결정자: 공공조달·펀딩으로 빈 영역 타깃 개발을 지원하고, 교육과정에서의 불균형을 임시방편 축소가 아닌 ‘도구 생태계 확충’으로 해결하자.
출처논문:
Kanso, H., Gueye, M. L., & Roig, P. J. (2025). Enhancing digital learning through open-source computer tools: An alignment with the DigComp framework. Frontiers in Computer Science, 7, 1552695. https://doi.org/10.3389/fcomp.2025.1552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