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로 여는 소녀들의 STEM 도전기
“공간감각이 미래를 바꾼다”
한 번 상상해보자. 학교에서 수학 시간에 도형을 배우는데, 칠판에 그려진 입체도형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3D로 그려지지 않는다면? 이건 단순히 공부의 어려움이 아니라, 미래 진로의 방향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문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공간 능력(spatial ability)**의 차이가 여학생들의 이공계 진출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여학생들이 STEM에서 밀리는 이유
전통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교육과 놀이 문화는 남학생에게 유리하게 설계돼 왔다. 블록 쌓기, 3D 퍼즐, 지도 탐험 같은 활동은 남학생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졌지만, 여학생들은 주로 한정된 공간에서 인형놀이나 소규모 역할극에 더 많이 참여했다.
그 결과, 남학생들은 방향감·공간 회전 능력이 발달했고, 여학생들은 이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했다. 문제는 이런 차이가 고등학교, 대학 진학 시점까지 누적돼 물리, 공학, 컴퓨터 과학(PEC 분야) 진입 장벽이 된다는 점이다.
공간감각,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
흥미롭게도 연구는 공간 능력이 타고나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향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정신 회전(Mental Rotation) 훈련은 짧게는 몇 주 만에 눈에 띄는 개선 효과를 보인다. 시간 제한을 없애면 남녀 간 성과 차이가 거의 사라진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즉, 어릴 때부터 여학생들에게도 이런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면 성별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춘기, 고정관념이 굳어지는 시기
사춘기(10~18세)는 정체성과 가치관이 빠르게 자리잡는 시기다. 친구 집단과 온라인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건 내 분야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깊어질 수 있다. 수학과 과학이 ‘남자의 것’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는 여학생 스스로 STEM에서 발을 빼게 만든다. 문제는, 이 시기에 형성된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 대학 전공 선택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의 반격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논문은 신기술을 활용한 게임형 학습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여학생이 ‘연구자 역할’을 맡아 초등학생(특히 여자아이)들에게 3D 도형을 가르치는 AR 게임을 만든다. 참가자는 도형의 면, 꼭짓점, 모서리를 직접 세어보고, 확대·회전하며 구조를 익힌다.
게임 전후로 테스트를 실시해 성과를 확인하고, 학생 스스로 ‘내가 변화를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느끼도록 설계한다. 이런 경험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자신의 공간 능력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세계와 연결되는 메타버스 교실
또 하나 흥미로운 전략은 국제 교류형 VR 수업이다. PISA 성취도 평가에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공간 영역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국가의 또래와 가상공간에서 협력 과제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서구권 여학생이 “여자라서 STEM에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반대로 잘하는 해외 여학생을 직접 만나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발생한다. 이 심리적 충격이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된다. 이후 교사와 부모가 대화를 중재하며 성찰을 이끌어내면 효과는 더욱 커진다.
왜 이게 중요한가
공간 능력은 단순히 수학 문제를 잘 풀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의학 영상 판독, 로봇 설계, 우주 탐사, 건축, 데이터 시각화 등 현대 사회의 핵심 분야에서 필수 역량이다. 게다가 최근 연구는 공간 탐색 전략이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비(非)해마 의존형 전략은 장기적으로 해마 부피 감소와 연결될 수 있다.
즉, 소녀 시절의 공간 능력 훈련은 단순히 진로 선택뿐 아니라, 평생의 인지 건강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다.
결론 – ‘게임’이 바꾸는 미래
연구는 명확하게 말한다. 조기 개입 + 롤모델 + 디지털 학습이 결합되면 STEM 성별 격차를 줄일 수 있다. 특히, 재미와 몰입도를 갖춘 게임형 학습과 세계적 네트워크 연결은 사춘기 여학생에게 강력한 동기부여 도구가 된다.
앞으로 필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이를 교육 현장에 적용하려는 용기와 의지다. 여학생들이 “이건 내 길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대신,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야”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다음 세대 교육의 목표다.
Chamizo, V. D. (2025). Fighting STEM stereotypes in adolescence: The role of spatial skills, identity, and digital interventions. Virtual Worlds, 4(3), 36. https://doi.org/10.3390/virtualworlds4030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