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증 독자를 위한 서체, GreekDyslexic는 왜 외면받았을까?
서론: 읽는다는 것의 복잡함과 그 안의 소외
우리는 매일 수많은 텍스트를 읽으며 살아간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읽기는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난독증(dyslexia)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평범한 문장은 하나의 벽이 되고, 문자 하나하나가 장벽이 된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며, 우리가 접하는 글자들은 종이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갔다. 이는 서체의 형태와 배치가 가독성에 미치는 영향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다. 가독성(readability)은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닌, 정보 접근의 문턱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서체 개발은 단순한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라, 접근성과 포용성의 문제다.
배경: 난독증과 서체의 관계
난독증은 단순히 단어를 헷갈리는 증상이 아니다. 이는 언어의 해독과정에서 뇌의 정보 처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신경학적 차이로, 흔히 '읽기의 어려움'으로 표현된다. 문제는 단순히 글자 하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단어의 구조, 자간, 줄간격, 글자 굵기, 그리고 무엇보다 '서체 자체의 형태'가 난독증 환자에게는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부분 영어, 이탈리아어 등 라틴 알파벳 기반 언어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그리스어 같은 비(非)라틴 언어에 대한 접근은 부족했다. 이는 인류 문자의 다양성과 글로벌 정보 접근성을 고려할 때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GreekDyslexic: 새로운 그리스어 서체의 탄생
이번 연구에서 소개된 GreekDyslexic는 난독증 독자를 고려한 그리스어 전용 서체다. 기존 OpenDyslexic 서체의 특징을 기반으로 개발되었으며,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다:
- 그리스어 원어민 및 학습자를 위한 접근성 제공
- 수학/물리학 등에서 사용되는 그리스 문자의 명확성 보장
- 디지털 박물관 콘텐츠에서의 통합 사용 가능성 탐색
연구팀은 먼저 기존의 Arial 서체의 구조를 분석한 후, 그 글리프를 뼈대(skeleton)로 삼아 OpenDyslexic의 곡선 특성과 시각적 무게감을 접목시켰다. 이어 Coherent Point Drift(CPD)라는 알고리즘을 통해 글자 형태의 중간지점을 계산하고, 실제 난독증 독자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글자의 아래쪽을 두껍게 처리하는 방식으로 시각적 안정성을 높였다.
실험 설계: 가독성 테스트는 어떻게 이뤄졌나?
연구진은 98명의 성인 그리스어 사용자(그중 19명은 공식적으로 난독증 진단을 받음)를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실험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세 가지 문화재 설명 텍스트
- 두 가지 수학 공식 (피타고라스 정리, 1차 함수)
- 네 가지 서체 비교: Times New Roman, Calibri, Arial, GreekDyslexic
각각의 텍스트는 동일한 크기(14pt), 자간, 줄간격을 유지하였고, 참가자들은 5점 리커트 척도(1=매우 불편, 5=매우 편안)를 기준으로 가독성을 평가했다.
결과: 기대를 저버린 GreekDyslexic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난독증을 고려해 설계된 GreekDyslexic 서체는 전반적으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문화재 설명과 같은 일반 텍스트 영역에서는 평균 2점 초반대에 머무른 반면, 수학 공식의 경우 평균 3점 가까이로 다소 나은 평가를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난독증 독자와 비난독증 독자 간에 '서체에 대한 선호 경향' 자체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으며, 오히려 익숙한 Arial, Calibri 등의 서체가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것이다.
비판적 시각: 왜 실패했는가?
GreekDyslexic가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은 두 가지다.
- 익숙함의 편향(Familiarity Bias): 대부분의 참가자는 이미 수년간 Calibri, Arial 같은 서체에 익숙해져 있다. 새로운 서체의 구조적 이점이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익숙한 것이 더 '편하다'고 느낀다.
- 서체 적용 범위의 한계: GreekDyslexic는 긴 문장보다는 짧은 수학식 등 단일 글자 단위에서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시각적 군집화(crowding)를 줄이기 위한 디자인이 오히려 문장 전체의 흐름에서는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확장 가능성: 실생활 적용과 후속 연구 방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GreekDyslexic 프로젝트는 여러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후속 연구 방향이 기대된다:
- 적응형 서체 추천 알고리즘: 독자의 연령, 학습 특성, 언어 습관을 반영해 서체를 자동 추천하는 맞춤형 디지털 리더 개발
- 읽기 환경 통합 연구: 서체뿐 아니라 배경색, 행간, 글자 크기 등 전체적인 '읽기 생태계' 설계
- 참여형 디자인 접근: 난독증 당사자가 서체 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공동 디자인(co-design) 방식 도입
- 다국어 지원 서체 개발: GreekDyslexic의 디자인 원리를 다른 문자 체계(한글, 키릴문자 등)로 확장
- 뉴로과학 기반 평가: fMRI, eye-tracking 등을 활용한 신경학적 가독성 분석
결론: "좋은 서체"란 무엇인가?
서체는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니다. 정보 접근의 문턱이 되기도 하고, 학습의 속도를 좌우하기도 한다. GreekDyslexic는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시도' 자체에 의의가 있는 프로젝트다. 사용자 중심의 설계 철학, 타 언어로의 확장 가능성,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의 텍스트 인터페이스 설계까지 고려한다면, 이 연구는 앞으로의 포용적 서체 디자인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읽는다는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지 않다. 특히 학습장애나 시각 처리의 어려움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좋은 서체'란 결국, 읽기를 조금 더 쉽게 만들어주는 조용한 조력자다. 그리고 그 조력은 디자인자의 미적 감각이 아닌, 독자의 인지적 특성과 이해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출처논문 (APA Style):
Bilotti, U., Demetriou, K., Fella, A., & Todino, M. D. (2025). Greek font design: identifying preferable fonts for readers with dyslexia. Frontiers in Computer Science, 7, 1610349. https://doi.org/10.3389/fcomp.2025.1610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