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아이들이 게임으로 배우는 ‘역사 속 다중 시선’ 이야기
전쟁의 진실을 찾아라!
"전쟁은 누가 옳고 그른 걸까?"
이 단순한 질문 하나에 답하기 위해, 키프로스의 11살 아이들이 마우스를 들었다. 이름하여 ‘팩트 파인더스(Fact Finders)’. 역사 수업이라고 하기엔 너무 흥미롭고, 게임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한 이 프로젝트는 아이들에게 단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역사는 하나의 시선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팩트 파인더스”, 전쟁을 이해하는 새로운 도구
1974년, 키프로스 섬은 전쟁을 겪었다. 그 여파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일상 곳곳에 남아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 가정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한 쪽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고통’만을 기억하고, ‘그들’에겐 벽을 쌓아왔다.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키프로스공대의 이올리 니콜라이두 교수는 그 해답을 ‘게임’에서 찾았다. EU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발된 팩트 파인더스는 전쟁의 기억을 양측(그리스계와 터키계)의 시선으로 보여주며, 아이들에게 ‘다중 시각(multiple perspectives)’의 개념을 심어준다.
게임 속 아이들은 가상의 역사 탐정이 되어, 다양한 증언과 뉴스, 예술작품, 사진 등을 조사하고, 어떤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일지를 직접 결정한다. 그리고 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줄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는다. 단순히 ‘정답’을 찾는 게임이 아니라, 진실을 구성하는 법을 배우는 게임인 셈이다.
게임은 아이들의 생각을 바꿨을까?
이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144명. 모두 키프로스에 사는 11~12세의 그리스계 학생들이었다. 게임 전후로 같은 설문을 받아, 게임이 아이들의 인식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살펴봤다.
결과는 흥미롭다.
- ✔ 역사 자료의 ‘신뢰도’를 더 잘 구별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인터뷰나 증언도 역사적 자료일 수 있지만, 편향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서로 다른 입장을 함께 담은 신문기사나 사진이 더 ‘믿을 만한’ 자료임을 알게 됐다. - ✔ ‘다중 시선’의 개념도 조금씩 자리 잡았다
게임 후, 학생들은 “역사에는 여러 시각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 좀 더 동의하게 됐다. “의견은 하나가 아니고 두 개일 수 있다”는 한 아이의 대답은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 “역사는 구성된다”는 개념은 어려웠다
아이들이 여전히 ‘역사 = 사실’이라고 믿는 경향은 바뀌지 않았다. 짧은 플레이 시간(30분)과 후속 토론 부재 때문일까. 이 부분은 게임만으로는 부족했음을 시사한다. - ❌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놀랍게도, 전쟁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문항에서는 약간의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 즉, 일부 아이들에겐 변화의 싹이 움튼 셈이다.
아이들 대부분이 게임을 통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고,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싶어 했다. 역사에 대한 관심, 그리고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는 작은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균형 잡힌 시선은 점수로 보상받는다”
팩트 파인더스는 단순한 교육용 게임이 아니다. 이 게임은 “정보를 고르는 법”, “진실을 구성하는 법”,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친다.
게임 속 점수는 단지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시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전쟁은 참혹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기억을 어떻게 전하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쩌면 11살 아이들이 누른 ‘마우스 클릭’ 하나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