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로 길 건너는 법을 배우다?
VR의 도움으로 노인들도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
노인을 위한 '길 건너기 VR' 훈련이 실제 안전감과 이동성 향상에 효과
“길 하나 건너는 게 뭐 어렵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 ‘길 하나’가 인생 최대의 난관이 될 수 있다. 자동차 소리, 빠른 속도,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 없는 보행자 환경... 젊은 시절엔 무심코 지나쳤던 거리 풍경이 어느 순간부터는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독일 보훔응용과학대학교와 쾰른스포츠대학교 연구진은 바로 이 문제에 주목했다. 그리고 세상에 없던 새로운 훈련법을 고안해냈다. 이름하여 ‘Wegfest’—노인을 위한 가상현실(VR) 기반의 길 건너기 트레이닝 프로그램이다.
왜 ‘길 건너기’인가?
실제로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교통사고로 부상당한 사람 중 12%, 사망자는 무려 29%가 65세 이상 노인이었다. 특히 75세 이상이 되면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반응 속도는 느려지고, 시야는 좁아지며, 걸음걸이는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즉, 단순해 보이는 '길 건너기'가 노인들에게는 복잡한 인지·운동 능력이 동시에 요구되는 고난도 작업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반복적으로 연습할 안전한 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 이 연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Wegfest’, 노인을 위한 진짜 같은 가상 도심
연구진이 개발한 ‘Wegfest’는 단순한 VR 게임이 아니다. 실제 독일 도심의 거리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1:1 스케일의 가상환경으로, 교통섬, 자전거 도로, 신호등, 횡단보도 등 현실적인 요소가 그대로 구현돼 있다.
사용자는 ‘메타 퀘스트2’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실제로 걸으며, 다양한 시간대(낮, 황혼, 밤), 교통량(저밀도~고밀도), 차량 종류(전기차, 자전거 등)에 맞춰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는 ‘길 건너기’를 체험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현실을 복제한 건 아니다. 연구진은 가상 공간 내 ‘충돌 경고 구역(ROW)’과 ‘위험 반응 구역(ROI)’을 설정해 사용자가 위험 상황에 처하면 가상차량이 자동으로 멈추거나 화면이 일시 정지되도록 설계했다. 무섭기만 한 체험이 아니라 학습이 중심인 셈이다.
단순한 체험을 넘어선 ‘변화’
그렇다면 이 훈련이 실제로 도움이 됐을까?
연구진은 70세 이상 노인 20명을 대상으로 8주 동안 ‘Wegfest’ 트레이닝을 실시한 뒤, 다양한 신체·심리 변화를 측정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 보행 능력(TUG 테스트): 평균 12.1초 → 10.6초로 향상 (p = 0.002, 대효과)
- 낙상 공포감(FES-I): 점수 감소로 공포감 완화 (p = 0.005)
- 주관적 안전감(VAS): 4.2점 → 6.8점 (p < 0.001)
- 인지 기능(MoCA):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지만, 훈련 수행에 문제 없을 만큼 유지됨
참가자 대부분은 “VR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길을 건너다 보니 실제 거리에서도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VR이 노인의 일상에 스며든다면?
‘Wegfest’는 단지 길을 건너는 법만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기술이 단절되기 쉬운 노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 훈련에 앞서 사용자들이 VR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튜토리얼도 구성됐고, 복잡한 컨트롤러 대신 손 제스처로만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처럼 연구진은 단순한 ‘기술 적용’이 아니라 노인 친화적인 ‘기술 설계’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결과,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훈련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일부는 VR 멀미로 중도 이탈하기도 했지만, 이는 향후 개선 여지로 남았다.
남은 질문들: 실제 거리에서도 효과가 있을까?
이번 연구는 파일럿 스터디로, 실험군만 존재하고 비교군이 없는 구조였다. 또한 VR 훈련이 실제 거리에서의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직접적으로 관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변화된 자가 인식과 기능 향상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연구진은 앞으로는 보다 정밀한 측정과 장기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 임상시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단순히 노인의 이동성 향상에만 국한하지 않고, 기억력 훈련, 사회적 상호작용 촉진 등 다양한 VR 활용 방향도 탐색 중이다.
기술이 노인을 도울 수 있을까? 이미 답은 나왔다
우리는 흔히 기술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Wegfest’는 그 고정관념을 깨트린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VR 속에서 길을 건너는 경험은 결국 현실 세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용기를 준다.
기술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특히 점점 늘어나는 고령 인구에게, 기술은 단순한 편의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작은 가상 세계가, 노인들의 큰 한 걸음을 만들어낸 셈이다.
📚 출처
Napetschnig, A., Deiters, W., Brixius, K., Bertram, M., & Vogel, C. (2025). Development and Evaluation of an Immersive Virtual Reality Application for Road Crossing Training in Older Adults. Geriatrics, 10(99). https://doi.org/10.3390/geriatrics10040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