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체가 ‘몸을 비틀 수 있다면’?
우리 몸을 지키는 단백질의 놀라운 유연성, 그리고 이를 예측하는 인공지능의 등장
우리가 감기에 걸리거나, 백신을 맞거나, 혹은 코로나19처럼 낯선 바이러스에 노출될 때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항체’와 ‘T세포 수용체’가 활약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치 맞춤형 열쇠처럼 바이러스 표면의 돌기(항원)에 꼭 맞게 달라붙어 병원체를 무력화한다. 하지만 이 열쇠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때로는 구부러지고, 때로는 휘면서 새로운 자물쇠에도 맞춰진다. 마치 변신하는 만능 열쇠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유연성, 즉 항체가 모양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해도 대응할 수 있는 ‘초특급 항체’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 발표된 연구는 바로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놀라운 도전을 다뤘다. 항체와 T세포 수용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CDR 루프’가 얼마나 유연한지를 AI가 예측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름하여 ‘ITsFlexible’. 말 그대로 “얘는 유연해요!”라고 알려주는 도구다.
항체의 손가락, ‘CDR 루프’의 유연함이 승부를 가른다
항체는 마치 손처럼 생긴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손끝, 그러니까 항원에 직접 닿는 부위가 바로 CDR 루프(Complementarity Determining Region)다. 특히 그중에서도 CDR3는 ‘손가락 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얼마나 휘어지고 움직일 수 있는지가 항체의 성능을 좌우한다.
어떤 항체는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어 하나의 바이러스에만 작용하는 반면,
어떤 항체는 말랑말랑하게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다양한 항원에 적응할 수 있다.
이처럼 CDR 루프의 유연성은 항체의 ‘정확도’와 ‘다재다능함’을 동시에 결정짓는다.
그러니 이걸 미리 안다면, 우리가 백신을 개발하거나 치료용 항체를 만들 때 훨씬 더 똑똑하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유연성을 예측하는 게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
대부분의 구조 예측 도구는 단 하나의 고정된 구조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요즘 핫한 AlphaFold도 마찬가지다. 생명체 단백질의 모양을 잘 맞추긴 하지만, ‘움직임’이나 ‘다양한 형태’까지는 예측하지 못한다.
이게 바로 이 연구팀이 주목한 부분이다.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그게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지까지도 예측해보자!"는 거다.
무려 120만 개 구조를 모은 ‘ALL-conformations’라는 데이터 괴물
AI를 훈련시키려면 결국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서 연구팀은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인 PDB에서 120만 개가 넘는 루프 구조를 몽땅 수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같은 루프가 여러 모양으로 등장하면 ‘유연한 루프’,
계속 같은 모양만 보이면 ‘딱딱한 루프’로 라벨을 붙였다.
이 데이터를 ‘ALL-conformations’라 부르고, 거기에 CDR3 루프들도 잔뜩 포함시켰다.
즉, AI가 학습하기에 완벽한 훈련장을 만든 셈이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AI 모델이 바로 ITsFlexible이다.
이 모델은 구조와 서열 정보를 입력받으면, 이 루프가 유연할지 아닐지를 예측해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델은 단순한 길이 정보나 노출 정도 같은 기준보다 훨씬 정확했다.
모양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복잡한 3D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실험으로도 확인했다: 진짜 유연했는지 직접 봤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연구팀은 말 그대로 "진짜로 이 예측이 맞는지 확인하자!"며, 3개의 항체를 선정해
실제로 그 구조를 cryo-EM(극저온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 결과는?
- 하나는 길이가 길지만 '유연하지 않다'고 예측됐고, 실제로 하나의 형태만 존재했다.
- 또 하나는 짧지만 ‘유연하다’고 예측됐고, 실제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존재했다.
- 마지막 하나는 예측이 빗나갔지만, 그건 항원이 결합된 상태라 구조가 고정됐기 때문으로 보였다.
결국 두 개 중 두 개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다.
단백질의 움직임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AI가 어느 정도 풀어낸 것이다!
항체 설계의 게임 체인저, 그리고 다음 단계
이 모델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신기하다'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치료용 항체나 면역치료제를 설계할 때, 목표에 맞는 유연성을 가진 분자를 선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변이에 강한 항체가 필요할 땐 '유연한 루프'를,
정확하고 강력한 결합이 필요할 땐 '딱딱한 루프'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도구는 비싼 분자동역학 시뮬레이션을 하기 전에, 가치 있는 후보를 미리 추려낼 수도 있다.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 연구 개발 효율이 훨씬 높아지는 셈이다.
앞으로는 이 모델이 실제 항체 설계 툴에 통합되고,
유연성 예측을 넘어, 다양한 구조 생성을 지원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생명과학과 인공지능이 함께 만든 이 진화된 예측 도구는
앞으로 우리가 면역을 이해하고, 약을 설계하는 방식을 바꿀지도 모른다.
출처
Spoendlin, F. C., Fernández-Quintero, M. L., Raghavan, S. S. R., Turner, H. L., Gharpure, A., Loeffler, J. R., Wong, W. K., Bujotzek, A., Georges, G., Ward, A. B., & Deane, C. M. (2025). Predicting the conformational flexibility of antibody and T cell receptor complementarity-determining regions. Nature Machine Intelligence. https://doi.org/10.1038/s42256-025-011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