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의 ‘다크호스’가 마침내 해냈다, 54큐비트로 범용 양자계산 가능성 입증

미래형 양자컴퓨터 장치와 빛으로 연결된 양자 상태를 표현한 이미지로, 54큐비트 기반 비가환 애니온과 범용 위상 양자계산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54큐비트 양자 프로세서에서 비가환 애니온의 브레이딩과 융합을 구현한 연구는 범용 위상 양자계산으로 가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양자컴퓨터에 관한 뉴스를 오래 읽다 보면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몇 년 전에는 50큐비트가 대단하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100큐비트, 1,000큐비트 이야기가 등장한다. 숫자만 놓고 보면 양자컴퓨터의 발전은 자동차 엔진의 마력 경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컴퓨터에서는 큐비트의 숫자가 전부가 아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지, 오류를 어떻게 억제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양자 알고리즘을 실행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2026년 발표된 한 연구는 상당히 흥미롭다.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 스토니브룩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 퀀티넘(Quantinuum) 연구진은 퀀티넘의 H2 이온트랩 양자 프로세서에서 54개의 큐비트를 이용해 비가환 애니온(non-Abelian anyons)을 구현하고, 이를 이용한 범용 위상 양자계산(universal topological quantum computation)의 핵심 연산을 실제 하드웨어에서 입증했다.


왜 54큐비트 실험이 주목받는가

54라는 숫자 자체는 오늘날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특별히 거대하지 않다. 이미 더 많은 물리적 큐비트를 가진 프로세서가 존재한다. 이번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큐비트 숫자가 아니라 그 54개를 이용해 어떤 종류의 양자 상태를 만들고 어떤 계산을 수행했느냐에 있다.

연구진은 54개의 큐비트 위에 S3라는 대칭군에 기반한 양자 이중모형(quantum double)의 위상 질서 상태를 만들었다. 쉽게 말하면 여러 개의 평범한 큐비트를 복잡하게 얽어 개별 큐비트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새로운 양자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안에서는 ‘애니온(anyon)’이라고 부르는 특이한 준입자가 등장한다.


애니온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전자나 광자와 달리 애니온은 주로 2차원 양자계에서 나타나는 준입자이다. 특히 비가환 애니온은 서로의 주위를 돌았을 때 시스템의 양자 상태가 변한다는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더 재미있는 점은 어떤 순서로 움직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 실에 비유하면 조금 이해하기 쉽다. 여러 가닥의 실을 서로 다른 순서로 꼬았다고 생각해보자.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매듭은 단순히 실을 몇 번 움직였느냐가 아니라 어떤 실을 어떤 순서로 교차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양자컴퓨터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브레이딩(braiding)’이라고 부른다. 연구자들은 이 독특한 성질을 계산에 이용하려 한다.


왜 위상 양자컴퓨터가 ‘다크호스’인가

양자컴퓨터 개발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오류이다. 큐비트는 주변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다. 온도, 전자기적 잡음, 제어 오차 같은 요인이 계산을 망가뜨릴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유용한 양자컴퓨터를 만들려면 수많은 물리적 큐비트를 이용해 하나의 안정적인 논리 큐비트를 보호해야 한다.

위상 양자계산이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자정보를 특정한 한 장소에 저장하는 대신 여러 입자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 저장하면 국소적인 잡음에 더 강한 계산 구조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비가환 애니온을 이용한 방식은 오래전부터 오류 내성 양자컴퓨터의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로 연구돼 왔다. 다만 실제 하드웨어에서 범용 계산까지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브레이딩만으로는 부족했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애니온을 서로 움직여 꼬는 브레이딩만으로는 필요한 모든 양자 연산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특정 계산은 가능하지만 범용 컴퓨터처럼 임의의 양자 알고리즘을 실행하기에는 부족했다.

연구진이 이번 실험에서 꺼내 든 두 번째 열쇠가 ‘융합(fusion)’이다. 두 애니온을 합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브레이딩과 융합을 결합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연구팀은 브레이딩으로 만들어지는 얽힘 게이트와 융합을 이용한 두 종류의 측정을 구현했고, 이들을 조합하면 원칙적으로 임의의 양자 연산을 구성할 수 있음을 보였다.


큐비트가 아니라 ‘큐트릿’을 만들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연구진이 정보를 단순한 0과 1의 두 상태로만 저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니온 쌍의 융합 공간을 이용해 세 가지 상태를 표현하는 ‘위상 큐트릿(topological qutrit)’을 만들었다. 큐비트가 두 단계의 양자정보를 표현한다면 큐트릿은 세 단계의 정보를 표현한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한 컴퓨터의 0과 1이라는 사고방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개념이다. 물론 큐트릿 하나가 곧바로 기존 큐비트 여러 개를 대체한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연구진이 애니온의 전역적인 융합 공간 자체를 정보 저장과 계산에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매직 스테이트’까지 위상적으로 만들었다

현재 오류 수정 양자컴퓨터에서 가장 비싼 과정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매직 스테이트(magic state)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오류가 적은 매직 스테이트를 만들기 위해 흔히 ‘매직 스테이트 증류(magic state distillation)’라는 복잡한 과정을 사용해야 하는데, 상당히 많은 물리적 큐비트와 계산 자원이 필요하다.

이번 연구에서는 비가환 애니온의 브레이딩과 융합을 이용해 위상적인 방식으로 매직 스테이트를 준비했다. 이것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장차 기존 오류 수정 방식에서 막대한 자원을 소비하는 일부 과정을 다른 방법으로 처리할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퀀티넘 연구진이 비가환 코드를 양자 오류 수정 경쟁의 ‘다크호스’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3년의 이론이 23년 만에 현실로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번 아이디어의 뿌리가 20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카를로스 모촌(Carlos Mochon)은 2003년 비가환 애니온의 브레이딩과 융합을 결합하면 범용 양자계산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이론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당시에는 상당히 추상적인 이론에 가까웠다.

23년 뒤 연구자들은 실제 양자 프로세서 위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현했다. 과학의 발전을 지켜보다 보면 이런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종이 위의 수학처럼 보였던 아이디어가 수십 년 뒤 실험실의 장비에서 실제 동작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쓸모없어 보이는 이론이 내일의 컴퓨터 구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준다.


그렇다면 범용 양자컴퓨터가 완성된 것인가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번 연구가 54큐비트짜리 완성형 범용 양자컴퓨터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구진이 입증한 것은 비가환 애니온을 이용한 코드 안에서 범용 계산에 필요한 게이트와 측정의 집합을 실제 양자 하드웨어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오류 수정과 장시간 안정적인 계산, 수많은 논리 큐비트의 구현, 실제 산업 문제를 푸는 수준의 확장성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이번 결과를 ‘당장 범용 양자컴퓨터가 등장했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과장이다. 그러나 범용 위상 양자계산으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 하드웨어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의미는 작지 않다.


양자컴퓨터 경쟁은 큐비트 숫자 경쟁이 아니다

이번 연구를 보면서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은 양자컴퓨터의 미래를 단순히 ‘누가 큐비트를 더 많이 만들었느냐’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초전도 큐비트, 이온트랩, 중성원자, 광자, 실리콘 스핀, 위상적 접근법 등 서로 다른 기술이 동시에 경쟁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물리적 큐비트의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안정적인 논리 큐비트를 만들 수 있는가, 오류 수정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 위에서 얼마나 복잡한 알고리즘을 신뢰성 있게 실행할 수 있는가이다. 자동차의 성능을 실린더 숫자 하나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54라는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번 실험의 진짜 의미는 54라는 숫자에 있지 않다. 연구진은 평범한 물리적 큐비트들을 정교하게 얽어 새로운 위상적 양자 상태를 만들고, 그 안에서 나타나는 비가환 애니온을 움직이고 융합하면서 범용 계산의 기본 도구를 만들어냈다.

양자컴퓨터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중요한 발전은 반드시 가장 큰 숫자에서 나오지 않았다. 때로는 전혀 다른 계산 방법을 발견했을 때 판도가 바뀌었다. 비가환 애니온이 실제 미래 양자컴퓨터의 주류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동안 ‘다크호스’로 불리던 방식이 실제 하드웨어에서 범용 계산의 문을 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자컴퓨터 경쟁이 이제 단순한 큐비트 수 경쟁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 오류를 견디면서 계산할 것인가’라는 더 본질적인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이다.


출처

Nature, “Universal gates from braiding and fusing anyons on quantum hardware,” 2026.
University of Chicago Pritzker School of Molecular Engineering, research news on universal quantum computation with non-Abelian anyons, 2026.
Harvard University Department of Physics, “Universal Gates from Braiding and Fusing Anyons on Quantum Hardware,” 2026.
PubMed, “Universal gates from braiding and fusing anyons on quantum hardware,” DOI: 10.1038/s41586-026-10709-y.